금연 : 2016년 9월 19일부터 (약 950일)
금주 : 2018년 1월 21일부터 (약 500일)
나는 3년쯤 전에 25년 동안 매일 하루에 두 갑씩 피웠던 담배를 끊었다.
그동안 쌓인 빚을 추가 집 담보 대출을 받아 청산한 후 열심히 해서 대출을 없애 보고자 했지만 음식점 운영은 쉽지 않았다. 여러가지 악재도 있었고 주변 환경 등 변명 거리는 많이 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결국은 장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음식점을 그만두기 1년 전부터는 매출이 부족해 월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처음 계약할 때 넣었던 월세 보증금을 야금야금 까먹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장모님은 사위에게 미안해서 말도 못 하고 있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면목이 없어 말을 못 하고 속만 태우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다 그만두기 두 달 전쯤 결국 모든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당시 집주인이 건물을 허물고 고시원을 짓겠다고 나가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일찍 알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쉽게 말도 못하고 다른 곳에 또 손을 벌려 모르게 해결하면서 두 모녀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문제를 더 키웠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다.
월세보증금은 못 낸 월세 대신 거의 다 없어진 상황이었고 다른 사업자를 들일 수도 없으니 거짓말로라도 권리금을 받을 수도 없었다. 건물주에게 사정하여 이렇게 나가라고 하면 권리금조차 받을 수 없으니 전부는 바라지도 않고 일부라도 도의적으로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사정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입자를 위한 권리금 관련 법안도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정말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장사가 잘 안 돼서 월세도 못 내는 형편인 것을 아는데 그런 것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결국 월세보증금, 권리금도 한 푼도 못 받고 빚만 잔뜩 진 상태에서 3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음식점 운영을 마치게 되었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아파트 시세의 절반 정도 되는 금액을 빚을 지고 일들이 마무리됐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잘했니, 니가 잘못했니 죽자고 싸우고 이혼하자며 사랑과 전쟁을 찍고도 남을 것 같은데 정작 그 상황이 되니 힘이 쭉 빠져 아무것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속이 시원하달까?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만 막연히 들고 너무 큰 대출금 액수에 갚은 수 있을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갓난아기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아내는 직장을 알아보았으나 경력 단절된 기간도 기간이지만 결혼하기 전에도 전문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운이 좋게도 출판사 경리 일자리를 그렇게 나쁘지 않은 조건에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월급은 최저시급에 가까운 액수였지만 매월 추가로 들어오는 공동 수입은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비록 아직 막막하긴 하지만 뜬구름 잡지 않고 이렇게 서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장모님은 장모님 대로 사위 빚을 청산해 주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로 알아보다가 장모님 지인 중 한 분이 일명 함바식당이라고 부르는 공사장 식당을 해서 크게 돈을 번 분이 계셨는데 식사를 제공하던 건설사에서 그때까지 기존에 하던 공사가 거의 다 마무리되고 다른 공사장으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건설사 소장으로부터 그쪽에 허허벌판이라 아직 먹을만한 곳이 없다고, 와서 식당을 열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겠다고 무리하게 장사를 하면서 무릎이 너무 안 좋아져서 더 하고 싶어도 못하겠는 상황이었고 고민하던 중 장모님의 안 좋은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인데 아까우니 대신 가서 해보지 않겠냐고 넌지시 운을 띄어 의사를 물어보셨고 예전 같으면 그런 일을 어떻게 하냐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뭐라도 해야 하는 생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다 생각하시어 식당을 오픈하기로 결심하셨고 얼마 되지 않는 초기 투자 금액이었지만 그나마도 어렵게 빌려서 다시 시작을 하셨다.
물론 초기에는 절대로 같이 식당을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으나 식당 특성상 기본적으로 발생하는 고정수익이 눈에 보였고 일손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을 쓰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게 우리 입장에서도 더 큰 수익이 될 수 있음이 확실해서 결국 또다시 같이 다시 식당을 운영하는 형태로 일이 진행되어 버렸다. 식당을 위해 우리는 집까지 이사를 하였고 나는 나대로 출, 퇴근 시간이 훨씬 길어졌으며 아내는 아내대로 새벽에 아침식사를 위해 출근하고 일의 특성상 저녁 장사를 하지 않아 퇴근이 그렇게 늦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일의 강도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몸은 힘들지만 희망이 보이는 상황이, 일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금전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방법이 보이지 않던 지옥 같은 상황과 비교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진하게 통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월 수입이 어렵지 않게 나 혼자 버는 액수의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심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이렇게 3~4년 정도만 낭비 없이 꾸준히 돈을 모으면 어느 정도 빚을 청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길이 보이니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하나가 잘되면 다른 하나가 안되고 하나가 안 풀리면 의외의 곳에서 다른 하나가 풀리기 시작하는 이치가 정말 무섭도록 잘 합이 맞아 돌아가는 것 같다.
얘기가 상당히 곁가지로 샜지만 상황이 진정국면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동안 나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술과 담배는 그 양과 빈도에서 이전의 배 이상이 되었으며 몇 년 동안 하루에 담배는 두 갑 이상, 술은 약속이 있건 없건 매일 적어도 소주 1병에 맥주 2000cc는 매일 마셨고 약속이 있으면 있는 대로 폭음을 하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괴로움을 잊고자 대체물을 찾았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이 들어가면 아내와 장모님 탓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쓸데 없이 낭비 안 하고 사채만 쓰지 않았어도 돈을 모았으면 모았지 이런 지경까지 올리가 있었겠냐?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얼마를 벌어오든 아끼고 아껴 집도 사고 하는데 당신은 오히려 결혼할 때 시댁에서 마련해 준 집까지 날려버릴 생각이냐고, 쥐 잡듯이 몰아붙이곤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할 말이 있었다. 말하자면 길지만 한번 정리해보겠다. 결론은 모든 것의 원인이 시댁의 차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본가는 집이 못 사는 편이 아니었다. 아버님이 건축 쪽 일을 오랫동안 하셨고 예전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대형 건설사의 임원으로 현장 총지휘를 하셨었고 퇴직을 한 이후로도 해외공사나 미군 대상 기지 공사 일을 오랜 세월 해 오셨고 지금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사업을 계속 유지하고 계신다.
3남 1녀였던 우리 집안은 아버님의 철학이 확고하셔서 집안의 기둥은 장남이었고 가족 구성원은 장남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보필하며 가족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형제 구성은 제일 손위 누님이 계셨고 형이 장남이었고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공부는 누님이 제일 잘했으며 형은 장남이었으니 자연스레 기대와 지원은 형과 누나에게 쏠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버지는 대단히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는 위치였고 어려웠던 시절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성은 모두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자신을 관리할 줄 아셨고 주변 사람들을 관리할 줄 아셨고 중요한 일에 모든 것을 걸 줄 아셨다. 자연스럽게 지원의 가치가 있는 형과 누나에게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었고 나와 동생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아버님 어머님은 겉으로는 형제들 차별 없이 키웠다고 하시지만 사실은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차별은 많았다. 누나는 중학교 때부터 예술전문학교에 보내 전문 고등학교 이대 예술학부를 나와 박사까지 마쳤고 형은 공부를 오히려 나보다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을 보내 MBA까지 억지로라도 마치게 했지만 나와 내 동생은 그냥 되는대로 공부해서 대학을 가면 가는 것이고 안되면 기술 배워라 수준이었다. 학창시절 눈에 보이는 차별은 있었지만 정작 나와 내 동생은 그런 것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정작 신경 썼던 것은 엄하고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집을 탈출하고만 싶은 생각뿐이었다. 장남이 잘되야한다고 생각하시는 아버님은 형에게 교육을 빌미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고 그 안에는 동생들에 대한 관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형은 우리를 교육받은 대로 취급하였었다. 그러나 조금 큰 잘못을 하거나 같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었으니 대학을 가기 전까지 나와 내 동생은 엉덩이에 멍이 사라지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차별은 이차적인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형은 학교에서 소위 알아주는 일진이었다. 무서워서 가출 같은 건 엄두도 못 냈었고 그냥 이 악물고 하루하루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평범한 성적으로 중위권 대학을 간 나는 이제부터 자유라는 생각으로 학교 일과 동아리 일을 핑계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수업도 거의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자연스럽게 성적은 바닥을 기었으며 어쩌다 집에서 아버지와 마주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더 바깥으로 나돌게 되었고 형이나 누나처럼 기대가 없어 지원이 없지만 간섭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자유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생활을 한 2년 하였고 이제 정신 좀 차려야겠다 생각하고 군대를 갔다 온 후 졸업할 수 있을 정도만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한 후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구구절절 집안 분위기까지 장황하게 얘기하고 있는 이유는 아내의 생각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집안의 세세한 사정을 몰랐던 아내와 나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같은 종교단체에서 청년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우리 집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장이 이끄는 유복한 집안이었고 저런 집에 시집을 가면 시집 잘 가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도 종교활동을 하시며 단체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같은 교회에 다녔던 처가 쪽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을 알고 계셨고 우리의 교제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어쩌면 신분상승의 길로 접어든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며 주변의 축하도 받아가며 결혼을 하긴 했는데 실제로 결혼생활을 시작해보니 그냥 남들과 별다를 바 없다는 것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겉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아파트는 시댁에서 마련해 주셨지만 그것도 결혼한 즉시가 아니라 처음에는 월세로 시작했고 당분간 세를 대신 내주시는 정도였다. 당시에 본가 쪽 상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돈이 일시적으로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었던 것 같고 아버님도 기본적으로 이제 결혼했으니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헤쳐나가라는 주의셨다. 더구나 나는 애초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아서 큰 기대도 없었지만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던 아내와 처가 쪽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그동안 어느 정도 시댁의 경제력까지 포함하여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입밖에 내지 못해서 대놓고 다그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의 수위가 높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를 통해 압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매주 본가에 찾아가 아파트를 부탁하며 결국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해 주시게 되었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 고마움도 모두 상쇄시켜버리는 것이 “상대적 사고”의 무서움인 것 같다. 이 “상대적 사고”의 덫에 걸리면 상식적인 은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그나마 다른 가족들처럼 평소에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기만이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아버님은 가족들과 같이 모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여 가족 식사 모임이 잦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교육이나 집안 대소사에 대해 얘기하는 일들이 많았고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아버님이 형과 누나에게, 손자들에게 해주는 일들이 고스란히 아내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서로의 직업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 정확한 수입은 모르지만 대충은 이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입의 범위를 넘어간 지출에 대해서는 모두 부모님이 지원한 것으로 아내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물론 전부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 생각이 어느 정도는 맞았을 것이다. 뻔한 내 월급만으로 그들이 하는 그대로 할 수는 없으니 아내는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고 나는 나대로 본가에 사정해서 그렇게 살 생각 없다 그냥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게 좋다는 식이었다. 그것은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로 적용하겠다고도 했었다.
그렇게 결혼 초기부터 이어져왔던 갈등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 갔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수입 이상의 지출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 당시에 내가 얼마나 무신경했었나 생각하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결혼 초기에는 월급이 나오면 아내가 관리를 했었다. 철마다 가야 되는 여행들을 가면서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니 가격은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니 했었고 집에 날마다 쌓여가는 책들이나 아이들 장난감 등은 얼마 정도 하는지 가격도 몰랐고 알 생각도 없었으니 그냥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 것들이 사실은 본가의 형제들과 비교하며 또는 얘기를 전해 듣고 마련한 것들이 많았고 책 한 질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이었고 집안 창고나 애들 방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것들도 상당한 분량이 있었다. 그렇게 사 모은 것들, 쓴 돈들 중 일부는 시댁에서 지원해 준 것도 있었고 다른 것들은 싸게 살 기회가 있어서 또는 경품에 당첨되어 운 좋게 받아서 등등의 이유가 모두 있어서 설마 빚을 져서 저런 것들을 장만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무 무신경했던 것은 인정한다.
어쨌든 사채를 진 원인이 상당 부분 본가에 있다는 아내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집안의 분위기나 결혼 초기 생활까지 언급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나는 전혀 용서하거나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형이나 누나가 많이 받으면서도 그만큼 간섭을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난 마음에 들었으며 형과 누나처럼 평소에 해 드리는 것도 상대적으로 없었는데 어떻게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차별이 되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아내는 아마 이렇게 일이 심각해지긴 했지만 모든 게 드러나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시댁에서 돈을 조달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하기도 했던 것 같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일들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일종의 자존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치부를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본가에 알리지는 않고 내부적으로 단속을 더 강화해서 해결해 볼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내도 자신이 한 일이 있으므로 적어도 겉으로는 그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생활 전반에 걸쳐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간섭하기 시작했다. 월급 중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한 비용만 생활비 명목으로 일부 떼어주고 공과금 처리나 아이들 교육비 지출 그 이외의 지출을 모두 내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아끼라고 했고 조금이라도 지출의 범위가 넘어가면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아내는 아내대로 잘못한 것이 있으니 심하게 반발하지도 못하고 매일매일의 삶은 음식점에서 일하고 쉬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벌이는 시원치 않았으며 자유는 제한당하는 아주 답답한 하루하루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서로 바라보는 곳은 다른 곳인데 몸은 같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 해도 쉽게 되돌릴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저 둘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이들도 있는 상황에서 결정하기 힘들기도 했고 우리 각자도 그런 큰 상황의 변화는 생계 및 삶의 질과 바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막연한 본능적인 공포로 인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때로는 서로 격려하면서, 때로는 원망하면서 서로 불만이 있어도 억누르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새로운 식당을 열고 이사를 하고 수입이 안정되기 시작하며 삶은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약 수입이 계속 고만고만하고 하루하루 허덕이며, 아주 작은 것에 아주 가끔씩 위안을 얻으며, 하고 싶은 것 못하고 쓰고 싶은 것 못 써가며, 빚에 치어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이 상태로 계속 살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 경험하지 못했을 상황, 생각치 못한 변화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냥 버티다 못해 안 좋은 – 물론 더 나중에 뒤돌아보면 서로를 위해 좋은 방향이었을 수도 있지만 -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사를 온 후 수입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서로 자신의 일을 하기 바빠 얘기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즐거울 시간도 별로 없었다. 나는 편도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출근을 위해, 아내는 새벽 장사를 위해 둘 다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가 나는 퇴근시간도 길기 때문에 집에 와서 밥을 먹지는 못했고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들어오면 술을 한잔하면서 컴퓨터를 하다가 또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잠이 드는 것이 다였다. 아내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며 서로 간에 말이 별로 없어도 이심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부부의 이심전심은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심적인 여유가 생기고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모든 것이 억울했었나 보다. 결혼 후 지금까지 시댁에 대한 의존도와 형제들과의 비교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 등을 곱씹어 보며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던 것 같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했던 것 같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약속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그동안 내가 일을 한답시고 술을 많이 먹고 다녔으므로 술은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고 넌더리가 난다던 아내가 술을 마시고 다녔다. 나는 일이 피곤하고 이제 숨통이 좀 트이니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푸나보다 하고 그냥 두고 보았지만 점점 빈도가 잦아져서 술을 먹고 또다시 새벽에 늦게 들어온 어느 날 잔소리를 좀 했더니 화를 내면서 더 이상 못살겠으니 이혼을 하자고 했다.
그동안 내가 가정을 살린답시고 했었던 모든 속박이나 잔소리들이 지독한 구속처럼 느껴졌고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가 싫었으며 무엇보다 아프고 추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나와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에 대한 사랑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고 어떻게 보면 이렇게 살게 된 원인을 제공한 시댁도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난다면서 지금까지는 나라도 없으면 애들을 굶기겠다 싶어 억지로 참고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그만두자고, 자신은 아직 젊으니 남은 삶을 하루라도 더 이상 낭비하기는 싫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상태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사랑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같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지 정도는 되는 줄 알았던, 서로 말이 없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은 있을 줄 알았던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니 담담하게 그 당시 일을 회고할 수 있지만 정말 지독한 충격을 받았고 그날을 정신없이 넘기고 며칠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지, 나도 괴롭게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사실 그 원인을 먼저 제공한 사람은 아내가 아니었는지, 너무 심한 충격에 심지어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내가 버텨온 삶이, 내 노력들이 완전히 부정되는 기분이 들었고 앞으로 살아갈 이유조차 깡그리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단순히 그동안 곪았던 상처가 터지는 순간이고 잘못한 주체에 대한 분석을 떠나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행동하려 했으며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못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던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내 입장에서는 너무 큰 배신감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배우자의 잘못만 보이면서 짙은 원망만이 쌓여갔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당시에 어느 정도 정리된 내 생각은 이렇게 끝내려고 지금까지 그 고생을 하고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가정을 똑바로 건사하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면 내 인생은 실패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수렴되게 되었다.
삶의 굴곡이나 고난 앞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사람은 많겠지만 실제로 자살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자살 직전까지 가본 사람은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당시에는 인생이 부정되는 느낌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이긴 했지만 복수심에 불타서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고 싶기도 했고 치기 어리지만 나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도 궁금했던 것 같다. 결심을 하고 준비를 했으며 실행 당일 생각한 장소로 이동을 하면서 문자로 내 결심과 현재 상황을 얘기했다.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다고 그동안 내가 잘못한 것들은 이해하라고 애들을 잘 부탁한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이러지 말라고 같이 열심히 살아보자고 할 줄 알았다. 그렇게 까지는 안 한다 쳐도 적어도 경찰에 신고라도 할 줄 알았다. 장문의 문자를 보냈지만 별다른 답변 없이 묵묵히 보고만 있다가 딱 한마디 했다. 남편 잡아먹은 죽일 년 만들고 싶은가 본데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 정도는 받아들이겠다고. 그 얘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면서 갑자기 너무 억울한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다. 나 혼자 뭔가 기나긴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내가 맞다고 생각한 것은 실제로 맞는 것이 아니었을 수 있으며 옳다고 생각한 것들이나 잘못됐다고 생각한 것들도 모두 내 생각과는 다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세상은 기본적으로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며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노력을 통해 나를 둘러싼 환경을 좀 더 살아가기 좋게 만드는 것일 뿐이지 영원한 내편이나 영원한 적은 없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체감했고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를 바꾸기보다 무리하게 주변을 바꾸려 했던 내가 보였으며 진정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이제는 나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분출하듯이 울컥울컥 눈물과 함께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오전에 있었던 마지막 문자를 이후로 서로 아무런 연락 없이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퇴근시간 무렵 아침에 아무 말 없이 나왔던 것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도 아무 말도 없었으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했다. 경찰에 신고하기는커녕 심지어 사소한 모든 것을 상의하는 장모님에게 조차도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날 하루 만에 담배를 네 갑 이상이 피웠었다. 집에 들어온 후 목이 너무 아파 물을 마시고 저녁은 먹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가 일찍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새벽녘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혼자 살아갈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방임하면 안 된다는 것. 계속해서 발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려면 체력이 필수이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를 통해 나오고 지금까지 주변 상황이 아무리 괴롭게 흘러간다 하더라도 덩달아 내 몸까지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이 모든 한심한 상황들은 모두 자기 연민에 의해 발생한 신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짓거리 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그동안 나는 심하게 나를 보고 살지 않았다는 것. 너무 나를 둘러싼 외부 환경만 보고 살았고 외부 환경의 상황과 피드백만 비참할 정도로 신경 쓰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하나씩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왔던 것은 결국 그 누구를 위해서도 올바른 방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바로 그다음 날부터 담배를 끊었고,
나중에 완전히 그만두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술도 같이 끊었다.
이전에는 너무 삶의 구석구석 파고들어 있어 끊을 생각도 못했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하루 만에 그냥 당연한 것처럼 끊을 수 있게 되었고 병원의 도움을 받아서 그랬던 건지 정말 사람이 변하다 보니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별다른 금단증상이나 고통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 네 갑을 피웠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하루에 한 가치도 피우지 않게 되었으며 며칠 지독한 불면증에 고생하긴 했지만 없으면 잠도 들지 못할 정도였던 술도 그냥 자연스럽게 내 생활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대략 3년 전쯤 담배를 끊게 된 이유이며 이후에 내가 변해가면서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나의 삶이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한번 써 보기로 하겠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아픈 상처를 너무 구체적으로 후벼 파고 다시 끄집어내는 것 같아 많이 괴로웠고 숨쉬기가 답답할 정도로 갑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분이나 결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그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여 일부러라도 끝까지 정리를 해보았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의 치부를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또 다른 큰 용기가 필요했으나 앞으로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나의 마음이 진심임을 표방하는 행위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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