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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에세이

내가 술, 담배를 끊은 이유(1부)

by 프레시가이 201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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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 2016년 9월 19일부터 (약 950일)

금주 : 2018년 1월 21일부터 (약 500일)

 

 나는 3년쯤 전에 25년 동안 매일 하루에 두 갑씩 피웠던 담배를 끊었다.

 그 이전에 안 해본 금연방법(최장 3일 금연 성공)이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결국 의학의 힘(챔픽스)을 빌려 담배를 끊을 수 있었고 금연을 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술도 입에 대지 않기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금주까지 이어지게 됐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 꽤 긴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흡연과 음주를 했음에도 그랬던 것에 비해 심한 물리적 금단증상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가장 힘든 부분이 있었다면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보통 술이나 담배를 끊는 이유는 건강이나 주위 사람들의 권고, 사회적인 압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런 피상적인 원인만으로는 감히 쉽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프로젝트 PM으로 국가보훈처에서 몇 달 상주하며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폐암에 걸려 있는 상태였고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도 듬성듬성 빠져있었으며 이빨도 이와 이 사이가 벌어져 50대 남자였으나 흡사 마귀할멈 같은 용모를 하고 있었는데도 항암치료가 끝나고 출근을 하면 또다시 담배를 피웠다. 

 가족들 생각해서라도 좀 자제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 가족들 앞에서는 안 핀단다. 그렇게 먼 곳으로 가기 전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다 프로젝트 끝나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무수히 많다. 비단 금주, 금연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유지해오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으로도 알게 되었다. 

 잡설이 길었지만 이제부터 내가 금연, 금주를 하게 된 이유를 지금부터 담담하게 되돌아보고자 한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사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요새는 정말 흔하디 흔한 말이 되어 버렸지만 막상 내 아내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받았던 느낌은 남들 다 쉽게 하는 흔하디 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내 관점으로 보았을 때, 결혼 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남들 다 있는 것 같은 시댁과의 불화, 젊은 시절 술을 좋아해 내가 몇 번 친 사고,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바람을 피운 적도, 비록 많은 돈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지만 한 달이라도 수입이 없었던 적도 없었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황당했다. 오히려 이혼이라는 말은 아내에게 서가 아니라 내가 할 말인 것 같기도 했다.

 8년 전쯤 우리는 잘 살아보겠다고 아파트 담보대출을 받아 요릿집을 오픈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고 혼자서는 경험도 없고 연륜도 없으니 장모님도 같이 하자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처음에는 그냥 해볼까 하는 말이 결국 현실이 됐다. 월급쟁이 수입이 한계가 있고 회사일이 힘들어 다른 살길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무엇보다 가게를 운영해 보겠다는 당사자인 아내의 의지가 컸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왜 그렇게 의지가 컸을 수밖에 없었는지 다른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동태찜, 아귀찜 등이 주 메뉴였고 꿈에 부풀어 맛집이라는 곳에 돈을 내고 레시피를 배웠으며 가게도 운이 좋게 연남동에 2층 가정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근사해 보이는 곳으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장사가 잘 되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기에 아내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육아와 가게 운영을 동시에 할 수밖에 없었으며 나는 나대로 퇴근 후 가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일을 하다 녹초가 되어 밤늦게 같이 집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지만 정말 보람 있고 즐거운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오픈 후 몇 달 후부터 신장개업의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골손님은 있었으나 단골손님만으로는 운영, 유지가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가게 홍보를 한다고 전단지를 제작하고 지역신문 및 케이블 TV에 광고를 내고 소셜커머스를 활용하는 등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보았으나 매출은 쉽게 오르지 않았다. 자영업에서 장사가 안 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사실 별로 없는 것 같다. 월세와 인건비는 지속적으로 계속 나가는데 매출은 계속 떨어지는 상황은 그야말로 개미지옥 같은 상황이었다. 매출을 올려보겠다고 참 이런저런 방법을 정말 많이도 시도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왜 가게를 그리 급하게 오픈하려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사채를 쓰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댁의 형님이나 누님 애들과 비교해서 떨어지는 교육 및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출을 받은 금액이나 이자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아내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해서라도 이 상황을 무마시켜보고자 했고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음식점을 오픈하는 것이었다. 

 사용처를 보면 다른 용도로 쓴 것도 있지만 주로 애들 교재, 전집 조기교육 등으로 사용을 했다고 하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몇 년을 묵혀서인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때 내가 원인제공을 얼마나 했는지 아내가 잘못이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잘잘못을 규명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갈라서거나 이러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애들도 있었고 여기서 모든 걸 다 정리한다는 것은 생활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어차피 가게를 통해서 수입을 늘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그래서 또다시 집을 담보로 빚을 지게 되었다. 사채업자들과의 투쟁도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사채였으므로 이자를 법정이자만큼만 지불하면 되었기에 법원에 개인회생 신청을 하면서 업자들과의 "안 받을래? 이것만이라도 받을래?" 식의 담판을 통해 눈덩이처럼 쌓인 이자를 어느 정도는 낮출 수 있었으며 그럭저럭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어마어마하게 싸웠으며 진이란 진은 다 뺐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 이후로 심기일전하여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으로 식당만 잘 운영됐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할 말은 많지만 하고 싶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아서 여기서 줄이기로 하고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3년 정도 유지하다가 대출금 및 이자 등 빚만 잔뜩 지고 식당을 접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이 빠질 정도로 많은 경험을 했고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담배는 필수였다. 매일 술을 먹었으며 하루에 2갑 이상씩 매일 담배를 피웠다. 나름 이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한 단계 더 성장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한 가지 생각 못했었던 게 있었나 보다. 그건... 원인제공을 하고 그 과정을 같이 겪었던 아내의 마음이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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